종교는 과학적 세계상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Science without religion is lame. Religion without science is blind.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1879-1955)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저는 종종 라디오를 듣습니다. 주로 듣는 방송이 NPR이라는 방송인데요. NPR은 National Public Radio의 약자입니다. 이 라디오 방송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청취자들이 기부하는 돈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치, 경제부터 예술과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소식을 상업적 이익에 휘둘리지 않고 다룹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FM 93.9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영어공부에도 NPR 방송은 도움이 됩니다. 웹사이트에 가보면 방송된 뉴스를 공짜로 다시 들을 수 있고, 뉴스 원고도 역시 올려져 있습니다. 영어공부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http://www.npr.org 에 가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날도 여느때 처럼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하고 있었는데, NPR 뉴스에서 흥미로운 뉴스를 전해 주더군요. 어느 과학자가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요. 쥐 2마리를 한 우리에다 놓습니다. 그 중 1마리는 좁은 튜브에다 가둬 두고, 다른 1마리는 자유롭게 풀어 둡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운 상태의 쥐의 반응을 관찰한 실험입니다. 실험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은, 쥐들이 덫에 걸린 동료 쥐를 보았을 때 이를 나몰라라 하지않고 기꺼이 도와줄 정도로 이타적으로 행동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이익을 희생시키면서 까지요.

실험 자체는 매우 간단합니다. 하지만 이 실험결과가 주는 메시지는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선 인간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해볼 수 있겠죠. '사람이 쥐만도 못하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시 나는 너무 이기적이지 않았는지 돌아보는 도덕적 성찰의 계기가 됩니다. 

정말 중요한 메시지는 기사의 후반부에 나옵니다.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배려하는 이타심은 과연 인간, 넓게는 영장류만의 전유물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 실험은 이타심이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믿을 만한 이유 중에서, 하나는 그 근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실험으로부터 얻은 사실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입니다. 신과 인간과 동물, 이 사이에서 인간의 위치는 어디인가? 인간의 생물학적 위치는 신학적 위치와 동일한가? 이런 문제를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사 말미에 이번 쥐 실험은, 과연 어떤 유전자가 <심리적 공감>을 제어하고 있는지를 연구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학적으로 표현하면, 이런 종류의 연구는 그 철학적 밑바탕에 <유물론적 환원주의>를 가정하고 있습니다.

<유물론적>이라는 의미는 생명현상을 물질현상 (물리적-화학적 현상)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원주의>는 어떤 복잡한 구조라도 이를 부분 부분으로 쪼개고 나서 각각의 부분을 이해할 수 있다면, 원래의 복잡한 구조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심리적 공감>이라는 복잡한 심리현상을, 유전정보를 담고 있는 DNA의 물리적 화학적 구조결정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려는 연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연구 또한 신학적 충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심리적 현상마저도 물리적 화학적으로 설명가능 하다면, 우리가 종교적 체험이라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로 설명 가능하지 않겠는가 입니다.

과학이 전해주는 이런 사실이나 태도를 크리스천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런 메시지가 제기하는 문제는 과연 타당한 물음이기는 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과학은 이런 물음에 궁극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지식으로 얻은 세계상은 신앙과 상호 모순적일 수 밖에 없는 걸까요? 과학과 종교의 대립을 해소하고 세계를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과학과 신앙은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에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왔지만, 우리의 행위와 판단을 좌우하는 신념들은 경직된 과학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고 20세기의 저명한 학자들은 강조합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과 종교의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면서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유물론적 환원주의라는 과학적 사유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에르빈 슈뢰딩거 Erwin Schroedinger (193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는 오히려 <과학은 선과 악, 신과 영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과학적 세계관은 자기 스스로 윤리적 가치와 미적 가치를 제거해 버렸으며, 우리들의 궁극적인 의도나 목적등을 표현하는 단어들을 소유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 ...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질문이다. 과학은 그것에 관하여 전혀 대답할 줄 모른다. <현대 물리학과 신비주의, 박병철 공국진 역>

합리성만으로는 인간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과학은 영혼, 선과 악, 신과 영원 이런 문제에 관해서 전혀 대답할 줄 모릅니다. 과학은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합리성은 신비로움으로 보충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종교는 과학적 세계상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과학적 세계상을 통해 얻은 지식으로, 종교는 스스로를 순화시키며, 그 결과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의미에서 종교와 과학 사이에 진정한 대립이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의 블로그 이름이 레게인(legein)입니다. 이는 그리스 말로 <하나로 모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아무렇게나 모으는 것이 아니라 <셈하면서 모은다>라는 뜻입니다. 즉 질서를 갖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레게인>의 명사형이 로고스(logos) 인데요. 로고스는 언어(말), 논리, 이성, 수학적 비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게인이 '이야기 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 하나하나의 낱말을 문법적 질서에 맞게 모으면 전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점에서 '하나로 모은다'라는 의미가 되살아 납니다. 마찬가지로 생각을 질서있게 모은다라는 의미로 논리, 이성적으로 행한다 이런 뜻을 가집니다. 논리학(logic)이란 말도 어원이 로고스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로고스는 인간의 이성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우주의 합리적 질서>까지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로고스가 이성, 논리에만 국한 되고, 신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게 아닙니다. 

신약성경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장 1절>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 로고스가 있었다. 로고스는 신과 함께 있었고, 로고스는 신이었다.

현대 과학문명에 심하게 오염(?)된 사유방식에, 어떤 균형점을 찾으려고 과학과 종교, 이성과 신앙, 로고스(logos)와 파토스(pathos), 이런 문제를 꽤 오랫동안 생각해 왔었는데, NPR 뉴스를 듣고 한번 써 봤습니다. 아래의 NPR 사이트에 가시면 기사를 보실 수 있습니다. 한글 번역도 같이 올립니다. 저의 다른 글은 http://legein.egloos.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npr.org/2011/12/09/143304206/cagebreak-rats-will-work-to-free-a-trapped-pal

덫에 걸린 동료 쥐 구하기

누군가를 “쥐새끼”라고 부른다면 이는 절대 칭찬이라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쥐들은 덫에 걸린 동료 쥐가 있을 때 그 고통을 모른 척 하지 않으며 기꺼이 도와줄 정도로 이타적이라고 합니다.

단지 덫에 빠진 동료를 구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 연구에 의하면 쥐들은 달콤한 과자 부스러기 유혹 속에서도 동료를 구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동료를 덫에 그냥 내버려 둔 채, 혼자서 과자를 독차지 하는 게 아니라, 동료를 먼저 구해주고 나서 함께 나눠 먹는다는 것입니다. “쥐들이 이렇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라고 시카고 대학의 신경생리학자인 페기 메이슨은 말합니다.

메이슨의 연구팀은 심리적 공감이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실시했던 일련의 실험내용을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습니다. 연구팀이 실험 대상으로 쥐를 선택한 이유는, 기존의 연구를 통해서 설치류는 동료들끼리 서로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험실에서의 예를 들면, 고통 속에 있는 동료 쥐를 보는 친구 쥐는 마치 자신도 동일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이를 <감정의 전이 emotional contagion>라고 부릅니다. 인간에게서도 물론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기 하나가 울기 시작하면 나머지 아기들도 같이 따라 우는 것이 그 예입니다. 하지만 메이슨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감정의 전이가 최종적으로 미칠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어요. 공감한다는 것은 그냥 심리적으로 그렇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 느낌이 다른 동료를 위해 구체적인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동료 구하기

그래서 메이슨이 이끄는 연구팀은 한가지 실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만약 고통 속에 있는 친구 쥐를 보았을 때, 그 고통을 그냥 공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도움을 주려는 행동을 취할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입니다. 서로 친구 사이인 2마리 쥐를 꺼내서 우리에다 놓습니다. 그 중1마리를 작고 비좁은 투명한 튜브에다 가둬 둡니다. 편한 상태는 아닙니다. 비좁은데 있어야 하니 좋아할 리가 없겠죠. 그래서 갇힌 쥐는 도와 달라는 신호를 친구에게 보냅니다.

바깥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던 동료 쥐가 이를 바로 알아차립니다. 그리고는 동료 구하기에 나섭니다.

바깥 쥐가 친구가 갇혀 있는 튜브 주위를 왔다 갔다 합니다. 튜브위로 올라가 보기도 하고 깨물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튜브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서 뭔가를 함께 해보려고도 합니다. “튜브에 갇힌 쥐가 작은 구멍으로 꼬리를 쑥 빼면, 바깥 쥐가 이걸 잡아 당깁니다” 라고 메이슨은 말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본 끝에 바깥 쥐는 문을 여는 단추를 우연히 누르게 되어 친구를 튜브에서 꺼냅니다. 이제 쥐들을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리는지 쉽게 알아차립니다. 실험이 반복되면서 문을 여는 시간도 점점 짧아집니다. 하지만 튜브에 있는 것이 동료 쥐일 때만 그렇습니다. 튜브안이 비어 있거나 모형 쥐를 놓았을 때에는 문을 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튜브의 문을 다른 우리로 통하게 해놓은, 그래서 자유롭게 풀려난 후에도 서로 같이 지낼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실험에서도 쥐들은 동료 구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쥐들이 튜브의 문을 열려고 하는 것은 정말로 친구를 도와주기 위함이지, 같이 놀아줄 친구가 필요해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도움을 주려는 행동

연구팀은 쥐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자 했습니다 – 동료를 구해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물론 인간이 쥐에게 이렇게 바로 물어 볼 수는 없죠. 그래서 쥐의 대답을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질문을 바꿔 보았습니다.” 라고 메이슨이 말합니다.

그래서 과자를 사용해 보았습니다. 쥐들이 있는 우리에 튜브 2개를 가져 다 놓습니다. 한 튜브에는 과자를 놓아두고, 다른 튜브에는 동료 쥐를 가두어 놓습니다.

연구팀은 쥐들이 튜브 2개를 열 때 어느 한쪽을 특별히 먼저 연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특별한 순서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과자도 다 먹지 않았고 오히려 동료와 나누어 먹었습니다.

쥐들이 서로를 돕는 친-사회적인 (pro-social) 행동을 한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는 있지만, 쥐들의 이런 행동에 관한 심리적 상태 전부를 알 수는 없다고 메이슨은 말합니다. “쥐들이 인간처럼 이런 행동을 의식적으로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심리적 공감이 설치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영장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소수의 어떤 쥐들은 아예 튜브의 문을 열지 못했다고 메이슨은 말합니다. 자신도 친구와 똑 같은 고통을 받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차분히 어떤 행동을 취하기에는 그 충격을 떨쳐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친-사회적 행위

쥐를 대상으로 심리적 공감에 관한 연구를 해왔던 몬트리올 멕길 대학의 제프리 모길 교수는 이번 연구를 아주 놀라운 연구라고 평가합니다.

“사실, 덫에 걸려 도움을 청하는 동료를 구해주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과자를 나눠 먹는다는 것은, 이건 정말 다른 이야기 입니다” 라고 모길 교수는 말합니다.

모길 교수 연구팀이 행한 예전의 연구에 의하면, 쥐에게 일시적인 복통을 주면, 더 많은 시간을 암컷이 옆에서 함께 보낸다고 합니다. 암컷이 함께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는 횟수도 줄어든다고 합니다. 복통 때문에 좀 더 세심한 관심과 보호를 받게 되고, 실제 이런 관심과 보호가 복통을 완화시켜는 데 도움이 됨을 말해줍니다.

모길 교수는 이번의 새로운 연구는, 기존의 연구와는 다르게, 모호함을 줄이고 실험 결과의 확실성을 높였다고 말합니다.

“이번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그 결론이 매우 확고하다는 것입니다” 라고 모길 교수는 말합니다. “쥐들이 왜 서로 돕는지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서로 다른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쥐들이 친-사회적인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에 더해, 이번 실험은 준비나 과정이 매우 간단해서 모길 교수 실험실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실험실에서도 동일한 실험을 반복해 보거나, 혹은 확장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번 연구는, 도움을 주는 행위를 신경생물학적인 측면에서 연구할 수도 있고, 또한 과학자들이 심리적 공감과 관련 있는 유전자를 찾는데도 사용될 수 있다고 모길 교수는 말합니다. 그는 쥐들이 과연 친구 쥐가 아닌 낯선 쥐에게도 재빠르게 도움을 줄지 궁금해 합니다.

예전에는 이타적인 행동은 오직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타적인 행동을 쥐 같은 하등동물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모길 교수는 말합니다.

“이런 행동양식들은 어딘가로부터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 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서 볼 수 있는 비교적 간단한 형태의 사회적 행동양식을 다른 동물에게서는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Cagebreak! Rats Will Work To Free a Trapped  Pal

by Nell Greenfieldboyce
http://www.npr.org/2011/12/09/143304206/cagebreak-rats-will-work-to-free-a-trapped-pal

Calling someone a "rat" is no compliment, but a new study shows that rats actually are empathetic and will altruistically lend a helping paw to a cage mate who is stuck in a trap.

Not only will rats frantically work to free their trapped cage mate; they will do so even when there's a tempting little pile of chocolate chips nearby, the study reveals. Instead of leaving their pal in the trap and selfishly gobbling the candy all by themselves, rats will free their cage mate and share the chocolate.

"To me that's absolutely stunning," says neurobiologist Peggy Mason of the University of Chicago. "The fact that the rat does that is really amazing."

Mason and her colleagues designed a series of experiments, described in the journal Science, to explore the evolutionary roots of empathy.

They wanted to look at rats because they already knew, from previous work, that rodents can be emotionally affected by the emotions of their cage mates. For example, during lab procedures, mice seem to experience more pain when they see another mouse in pain.

This is called "emotional contagion," and humans have it too — just think of how one crying baby can make other babies cry. "But in the end, emotional contagion doesn't take you very far," says Mason. "It's an internal experience. It doesn't actually do anything for another individual."

Helping A Fellow Rat

So Mason and her colleagues devised a test to see if rats would take the next step and actually try to help out a fellow rat in distress. They took two cage mates, who knew each other, and trapped one of them in a narrow Plexiglas tube. That's a mild stressor and one the trapped rat doesn't like — it would sometimes make an alarm call.

The free rat outside of this tube seemed to immediately "get" the problem and would work to liberate its pal, says Mason.

The free rat would focus its activity on this plastic tube, crawling all over it and biting it, and interact with the trapped rat through little holes in the tube. "And if the trapped rat has a tail poking out, the free rat will actually grab that tail and kind of pull on it," says Mason.

Eventually, all this activity would lead to the free rat accidentally triggering a door that opened, releasing the trapped animal. The rats quickly learned to purposefully open the door, and during repeated experiments they would do so faster and faster — but only for a trapped rat. They didn't act this way when the plastic trap was empty or contained a toy rat.

Rats would free their pals even if the experiment was set up so that the other rat was released into a different cage, so that the two rats did not get to interact after the door was opened. This suggests that the door-opener was really trying to aid its fellow rat, and not just working to get a playmate.

A Helping Behavior

The researchers had a question for the rats: What is it worth to you, to free your fellow rat? "Obviously we can't ask that question verbally, so we wanted to ask it in terms that a rat can communicate to us," says Mason.

So the scientists used chocolate. They put rats into a cage that held two different clear plastic traps. One contained chocolate chips. The other contained the trapped cage mate.

What they found is that the free rats quickly opened both cages, in no particular order. And they did not eat all the chocolate — instead, they shared it with their fellow rat.

While the rats clearly engage in pro-social helping behavior, Mason says it's impossible to know the rats' internal experience of all this. "I think it's extremely unlikely that the rat has the same conscious experience that we do," says Mason.

Still, this study shows that the roots of empathy extend all the way back to rodents and aren't something that's unique to primates, she says.

A minority of rats never opened the trap's door, says Mason. They tended to freeze, suggesting that they felt their partner's distress but could not shake it off and calm down enough to take action.

A 'Pro-Social' Behavior

Jeffrey Mogil of McGill University in Montreal, who has studied empathetic behavior in mice, says this is a surprising study.

"You know, it's one thing to free the trapped rat that might be making alarm calls. It's quite another thing to share the chocolate chips," Mogil says.

Previous work in Mogil's lab has shown that when mice are given a temporary stomach pain, their female cage mates will go spend more time near them. And the more time their cage mates spend with them, the less pain behavior the mice will show — suggesting that the extra companionship is in response to the pain and that it actually helps in alleviating it.

Mogil says the new experiment on cage-opening rats is "a lot more robust, a lot less subtle" than that earlier mouse study.

"What's impressive about the current study is that it's an active response," says Mogil. "We can argue about why they're doing it, but there's absolutely no doubt in my mind that they're doing something that can really only be called pro-social behavior."

What's more, he says, the experimental setup in this study is so simple that he expects lots of labs, including his own, to repeat the rat study and start expanding on it.

He says it could be used to explore the neurobiology of helping behavior and allow scientists to find genes that are involved in empathy. He also wonders if rats would be as quick to help strange rats that weren't known to them, as opposed to their familiar cage mates.

Even though, in the past, many scientists have assumed that altruistic behavior is something uniquely human, Mogil says we really should not be so surprised to see it in the lowly rat.

"Behaviors have to come from somewhere," he notes. "And so it would be almost absurd to expect not to see some sort of simpler form of human sociabilities in other animals."

by legein | 2011/12/31 15:34 | 최근 글 | 트랙백 | 덧글(0)

민주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며칠 전 경향신문에 한가지 재미있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예전에 미처 끝내지 못했던 글을 마무리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글은 몇 년 전에 썼던 글의 후속편이자 완결편이 되겠습니다. 전편의 글도 같이 읽고 싶으시면, 저의 블로그에서 <공자의 정명(正名)론을 생각한다>를 보시면 됩니다.(http://legein.egloos.com/287304)

신문기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역사교육과정 개정안을 발표했는데, 이 개정안에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학생들이 배울 교과서에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는 것이 왜 문제가 될까요?

경향신문 8월 17일자 <뜨거운 '자유민주주의' 논쟁… 역사교육과정 개정안 후폭풍> 기사를 인용해보겠습니다.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역사교육과정 개정 최종 고시안에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무단 변경한 것이 불씨가 되어 논쟁이 일고 있다.

한국현대사학회 권희영 회장(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공산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닌,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민주적 절차와 시장경제를 존중하는 민주주의”(경향신문8월17일자 13면 보도)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역사교육과정 개발정책연구위원회(정책위) 오수창 위원장(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은 17일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민주주의란 없다”며 “이런 (잘못된) 개념을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친다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니까 신문 기사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쪽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 <공산주의가 아닌 시장경제>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했다는 주장인데 반해, 반대하는 측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라는 의미에서의 <자유민주주의> 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잘못된 개념이라는 주장인데요.

뭐… 다 좋은 말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가 문제라는 건지... 그 말이 그 말 아닌가요? 그 말이 그 말이 아니니까 문제가 될 텐데요. 어쨌든 계속해서 기사를 보겠습니다.

헌법학자인 한상희 건국대 법대 교수는 “1960년 제2공화국 헌법 개정 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는 시장과 관계없는 개념임을 분명히 했다”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는 열려 있는 개념으로, 자유민주주의와 대등한 개념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최갑수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민주주의라고 할 때는 시장의 자율적 영역에 정치가 개입하면 안된다는 자유민주주의를 포함해 사회민주주의도 들어간다”고 말했다.

정치학 박사인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도 “민주주의에는 여러 가지 종류와 유형이 있다”며 “교과부가 이제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써오던 ‘민주주의’를 무리해서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한 것은 자유주의 틀 안에 민주주의를 가두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된다”고 밝혔다.

위에 3명의 학자들이 어려운 말로 인터뷰 해 놓았네요. 기사에 인용된 이들의 인터뷰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그렇습니다. 자유주의란 무엇일까요? 뭘 자유롭게 하자는 걸까요? ~~자유롭게 저 하늘을 ~~ 노래 가사처럼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 가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말 하자는 건가요? 거주 이전의 자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 양심의 자유, 뭐 이런 자유를 말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자유주의가 자유롭게 하자는 것은 <경쟁>을 자유롭게 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한 경쟁을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강한 놈만 살아 남는 정글의 법칙을 세우자는 말이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링위에 올라와서 다 같이 붙자. 그래서 이긴 놈만 살아 남는다. 비정한 사각의 링의 세계, 약한 것은 먹히는 정글의 세계, 승자 독식의 세계를 인간 세상에 실현하겠다는 것이 자유주의인 것입니다. <경쟁>을 무한정 자유롭게 하자는 것 그리고 승자가 모든 것을 취하자는 것,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의 핵심 모토인 것입니다.

이렇게 무한 경쟁, 자유 경쟁을 하기 위해선, 국가나 정부는 그 역할을 최소한도로 제한해야 합니다. 정부가 인허가권을 쥐고 있으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자유>경쟁을 훼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시장의 수요-공급을 간섭해서 가격을 조정하는 것, <자유>경쟁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자유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을 보호하기위해, 정부가 승자의 전리품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 세금을 걷어서 패배자에게 나누어 주는 것, <자유>주의의 기본이념을 흔드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장은 시장에 맡겨라. 정부 주도의 사업(수도, 전기, 도로, 방송, 의료, 공항)은 모두 민영화 해라. 정부는 시장에서 손을 떼라.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작은 정부를 선호합니다. 보통 언론에서는 규제 철폐,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 시장경제체제 강화, 공무원 감축, 이런 식으로 포장 되서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죠. 혹시 기억 하실지 모르겠는데, 2007년 12월 20일자 아침 야후 뉴스에 정확히 똑 같은 헤드라인이 떴었습니다. 그 날은 이명박 대통령 당선 확정된 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자유주의를 주장할까요? 당연히 그 무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이죠. 경쟁에서 질게 뻔한 사람이 ‘다 덤벼’ 라고 말할 순 없잖습니까?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서민이 교육시장 자유화하자고 주장할 순 없겠죠. 이런 주장은 사교육비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니까요. 따라서 자유주의는 자유경쟁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주장인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없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만약 신문에, 규제 철폐,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 시장경제체제 강화 이런 말들이 오르내리면 가장 먼저 긴장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서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 서민들은 자신들이 죽는 줄 모릅니다. 아니러니 하게도, 영세시장 상인, 노약자, 저학력자, 빈민층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합니다. 참 답답하죠. 가난이 대물림 되는 사회구조를 서민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이제 인터뷰 내용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the basic free and democratic order)는 자유민주주의와 대등한 개념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자유>는 자유시장과는 별개의 개념이므로 자유민주주의에서 무한경쟁을 의미하는 <자유>와는 당연히 다릅니다. 둘째로, 시장의 자율적 영역에 정치가 개입하면 안된다는 자유민주주의. 당연한 이야기 입니다. 이게 자유주의의 핵심이니까요. 마지막으로, 자유주의 틀 안에 민주주의를 가두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된다. 이 말은 무한 경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회구조를 민주주의라는 허울로 포장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문 제기인 거죠. 당연히 할 수 있는 의심입니다.

서두에서 이 글은 예전에 쓴 글 <공자의 정명론을 생각한다>의 후속편이라고 했는데요. 전편의 글에서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와 대립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란 사회주의가 바라는 모습과 가깝다고 했습니다. 이는 매우 도발적인 주장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사회주의는 보통 <좌파>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좌파라 하면 친북 용공세력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좌익 공산세력의 주장이 기독교인의 삶과 일맥상통할 수 있을까요.

자유주의(우파)와 대립된다는 의미로 사회주의(좌파)를 이해하고자 하면 비교적 쉽게 이해 가능합니다. 사회 보장제도라는 말처럼, 정부나 국가가 경쟁적 사회구조를 옹호하는 대신에, 사회주의는 경쟁의 출발선이 모두에게 공평한지, 혹시 낙오자가 생기더라도 재도전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사회적 안전망이 있는지, 소년소녀 가장이나 장애인, 노약자에게 사회가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는지 챙기자는 것입니다. 경쟁의 결과로 야기되는 불평등은 어느정도 어쩔수 없다 해도, 최소한 경쟁의 출발선에서 만큼은 모두가 공평한 기회를 갖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어 공부할 수 없어 출발선부터 뒤쳐지지 않게 의무교육을 정부가 제공하고, 돈이 없어 병원에 가볼 수도 없는 그런 경우가 없도록 의료보험을 국가가 맡도록 하자는 것이죠.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좌파의 개념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만이 격은 특수한 현대사적 경험 (일제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으로 인해 사회주의 좌파는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먼 친북 용공세력으로, 자유민주주의는 반공민주주의로 엉뚱하게 사용되어왔던 것입니다. 이래서 <정치의 시작은 정명(正名)이다>라는 2500년전 공자의 통찰력이 새삼 달리 보이는 까닭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용어 논쟁이 불거진 후, 조선일보가 8월21일자 [시론] <왜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는가>를 통해 정명(正名)에 어긋나는 주장을 실었습니다. 이 글의 밑바탕에는 (김대중 정부 = 친북 = 좌파 = 대한민국 폄하)를 하나로 묶고, 이에 대하여 (자유민주주의 = 반공 = 625를 이겨낸 대한민국의 정체성)  이런식의 대결구도를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보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자유민주주의는 안 된다'는 사람들은 친북 좌파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조선일보는 사회적 이슈를 이런 반공대결로 몰고가서, 본래의 논점을 흐리게 하고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방해합니다.

좌파 크리스찬?

경쟁이 없는 사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것이 반드시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경쟁을 무한정 부추기는 사회 또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불어 사는 삶을 꿈꾸는 사회라면, 크리스찬으로서의 사회적 역할을 생각한다면, 경쟁의 치열함 속에서도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고민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을 생각한다면 말이죠.


공자의 정명(正名)론을 생각한다
http://legein.egloos.com/287304

경향신문 <뜨거운 '자유민주주의' 논쟁… 역사교육과정 개정안 후폭풍>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linkid=33&fid=636&articleid=2011081721281629140

조선일보 [시론] <왜 자유 민주주의를 거부하는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8/21/2011082101245.html

보충자료



by legein | 2011/08/22 04:03 | 최근 글 | 트랙백 | 덧글(1)

성경의 저자들 (2)

성경에서 사무엘은 사사judge이자, 제사장priest이며, 선지자prophet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북쪽의 실로Shiloh라는 도시에 살았습니다 (삼상 1:21-24). 실로는 그 당시 종교적 중심지였습니다. 법궤가 바로 실로에 있었고 (삼상 4:3-4), 모세의 직계 후손이라 여겨지는 강력한 사제 집단이 실로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한두 지파만으로는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기 힘들자 이스라엘 민족은 모든 지파를 군사적으로 통합해 줄 지도자를 세웁니다 (삼상 12:12-13). 이런 이유로 사울이 이스라엘의 첫 왕이 됩니다. 이때 그를 왕으로 세운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정 시대가 된 것을 말해줍니다. 이후로 사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사제계급과 선지자는 강력한 세력으로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왕정체제로 바꿨어도 왕은 이스라엘의 절대 권력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왕은 각 지파의 부족장과 사제, 선지자들의 견제를 받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왕이 안정된 통치를 하기 위해선 부족장과 사제들의 지지, 선지자의 동의를 받아야 했습니다. 만약 왕이 이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큰 곤란에 처하게 됩니다. 사울이 그랬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 준 사제이자 선지자인 사무엘에 의해 버림받습니다. 사무엘 상권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에 버림받는 2가지 이유를 제시하는데 (삼상 13:9, 15:21), 공통적인 점은 사울이 사제직의 권한을 침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의 대응은 단호했습니다. 그는 사울 대신 다윗을 왕으로 세웁니다.


김흔중 <성서의 역사와 지리> 

다윗은 남쪽에 거대한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있는 유다지파 출신입니다. 유다지파의 땅은 다른 지파의 땅을 다 합친 만큼의 크기입니다. 사울은 왕권에 위협이 되는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아히멜렉이 이끄는 실로의 사제집단이 다윗을 지지하고 나서자, 사울은 실로의 사제들을 (실로 출신의 놉Nob의 사제들을) 모두 죽입니다. 그 학살에서 아히멜렉의 아들 하나만이 가까스로 살아 납니다 (삼상 22:16-20).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후 왕국은 다윗(남쪽) 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북쪽) 으로 나뉘어 집니다. 이스-보셋은 후에 암살되고 다윗은 왕이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초기 왕국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왕과 사제집단간에, 혹은 왕과 왕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는 후에 성경의 원전이 만들어 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이유 중에는 그가 영토도 작고 힘도 약한 벤야민 지파 출신이라는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삼상 9:21). 왜냐면 벤야민 지파가 다른 지파들을 압도하거나 하는 그런 상황이 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남쪽의 거대한 유다 지파 출신입니다. 그는 왕이 된 후 이스라엘을 통합하는 일련의 정책을 취합니다.

우선 유다 지파의 주요 도시인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김니다. 다윗은 왜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겼을까요? 그건 예루살렘이 원래 여부스족이 살았던 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삼하 5:6-13). 다윗이 그 땅을 빼앗았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와 아무런 연고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함으로써 다윗은 다른 지파의 경계심을 낮추는 동시에 유다 지파 만을 편애한다는 오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첫 번째 통합정책이었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1 명씩의 사제를 뽑아 새로운 수도 예루살렘에 2명의 사제를 지명합니다. 남과 북을 대표하는 사제가 공동으로 예루살렘의 사제직을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그 2명의 사제는 누구였을까요? 한 사람은 북부 출신의 아비아달입니다. 그가 바로 사울의 실로 사제집단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삼상 22:20). 다윗의 남부 측 사제는 유다 지파의 옛 수도 헤브론 출신의 사독입니다. 사독이 이끄는 헤브론 사제 집단은 아론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비아달과 사독은 북과 남을 대표하는 동시에, 모세와 아론의 사제가문을 대표하는 셈이기도 했습니다 (삼하 8:17). 셋째로 다윗은 여러 세력가문과 정략 결혼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부인을 여럿 두었고, 배다른 자식이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왕실 직속의 친위군대를 만듭니다. 이로써 각 지파의 징병으로 차출된 군대의 의존을 줄이고, 따라서 군사력에 있어서 각 지파의 의존도를 줄이면서, 다윗이 직접 통솔하는 왕실 친위군대를 만들어 왕권의 안정을 꾀합니다. 일련의 통합정책과 왕권의 안정을 통해 다윗은 에돔, 모압, 암몬땅을 정복합니다. 원래 실로에 있던 법궤도 예루살렘으로 옮깁니다 (삼하 6:12-15). 예루살렘은 새로이 통합된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가 됩니다.

다윗의 말년에 왕위를 경쟁하는 2명의 왕자가 있었습니다. 그 두사람의 왕자는 아도니야와 솔로몬 입니다. 그들은 서로 배다른 형제입니다. 아도니야는 다른 왕자들과 각 지파에서 차출된 군대(요압장군)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 솔로몬은 선지자 나단과, 밧세바, 그리고 왕실 친위군대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 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 아도니야와 솔로몬을 각각 지원하는 또 다른 2명이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이 바로 예루살렘의 대사제 아비아달과 사독이었습니다 (왕상 1:44-45). 북쪽지방 실로의 사제였으며 모세의 후손인 아비아달은 아도니야를 지원했고 (왕상 1:7-8), 반면 남쪽 유대지파의 헤브론의 사제이자 아론의 후손인 사독은 솔로몬을 지지했습니다.

다윗은 결국 솔로몬의 손을 들어줍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정적이었던 아도니야 왕자와 징병군 지휘관(요압장군)을 죽입니다 (왕상 2:25-35). 하지만 아비아달만큼은 쉽게 제거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모세의 후손이자 실로의 옛 사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비아달의 영향력이 계속되는 것을 두고 볼 수도 없었습니다. 대신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예루살렘의 사제직에서 내쫓고 시골로 귀양 보냅니다 (왕상2:26).

방금 위에서 보았듯이 다윗이 추구했던 남북 통합정책은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큰 타격을 입습니다. 북부 실로의 사제집단은 아비아달의 축출로 인해 예루살렘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어버립니다. 이 후 계속된 솔로몬의 정책은 남과 북의 긴장상태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솔로몬은 북부에서 걷은 세금을 남쪽 유다의 국경지대를 방어하는 군사비용으로 사용합니다. 또한 성전 건축에 필요한 백향목과 황금을 보내준 페니키아의 왕에게 그 답례로 북쪽지방의 영토 일부를 넘겨줍니다 (왕상 9:10). 기존의 지파의 영토를 무시한 행정구역 개편을 남쪽 유다는 그대로 유지한 채 북부지방에만 실시합니다. 당연히 북부의 지파들은 반발합니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북부의 불만이 가득한 가운데도 솔로몬은 하나의 왕국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고 나서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북부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합니다. 북쪽은 수도를 세겜Shechem으로 정하고 새로운 왕 여로보암을 세웁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남쪽의 유대왕국과 북쪽의 이스라엘왕국으로 양분 됩니다.

다음에 계속...

by legein | 2011/07/22 09:42 | 최근 글 | 트랙백 | 덧글(0)

송 창식 - 나의 기타 이야기



예술이나 종교, 혹은 과학이든
어떤 분야든지 오랜 시간 동안 깊게 천착하면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하나에서 만난다.

피타고라스의 행성 운행이 들려주는 <천상의 화음>에서,
스피노자의 <신에 대한 지적인 사랑>에서,
아인슈타인의 <신비의 숭고함에 직면했을때 느끼는 경이로움>에서,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어떤 것....

 

by legein | 2011/02/25 06:27 | 최근 글 | 트랙백 | 덧글(0)

성경의 저자들(1)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역사책으로 생각하고 읽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화나 전설을 기록한 책으로 생각하고 읽습니다. 일부는 성경을 성령의 감화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읽습니다. 성경은 역사의 기록물이란 관점으로 보아도 귀중한 자료이며, 문학적인 관점으로 보아도 빼어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도 성경은 유한인 인간에게 존재론적 감동을 주는 책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성경을 보는 시각과 관점이 다르다 해도, 성경만큼 많이 인쇄되고 성경만큼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책은 세상에 없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한 가운데 성경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평생을 성경을 연구하는데 바칩니다. 수많은 성직자들과 랍비들이 매주 성경을 기초로 설교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 묵상하고, 토론하고, 자신들의 삶에 이를 적용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의지해 살고, 때론 성경으로 인해 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건 정작 우리는 성경을 누가 썼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의 근간을 이루는 성경을 누가 썼는지 확실하게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편의 반 정도는 다윗이 썼다고 하고, 애가는 예레미아가 썼다고 합니다. 성경이 현재와 같은 형태로 정착 된 후, 많은 연구가들이 성경의 저자를 알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의 첫 대상이 된 것이 성경의 처음 5권, 즉 모세 5경이라고 부르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히브리어로 이 5권을 경전 또는 가르침이라는 뜻의 토라Torah라고 부릅니다.

 

모세 5경은 모세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한 사람이 썼다고 하기에는 내용상의 모순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사건의 순서가 처음과는 달리 나중에 가면 다른 순서로 기술되어 있고, 암수 한 쌍씩이라고 했다가 암수 일곱 쌍씩이라고 하고, 모압족속이 한일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미디안족이 한일이라고 하고, 성막이 만들어지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성막 앞으로 나아갔다고 하는 등의 모순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6장에 나오는 에돔왕의 이름들은 모세가 죽고 나서 한참 후의 왕들의 목록입니다. 모세 시대엔 결코 알 수 없는 목록인 것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용상의 모순에 더해 표현상의 문제점에 주목합니다. 스피노자는 유태인이지만 유태민족에서 파문 당한 매우 특이한 인물입니다. 그는 <가장 겸손한 자>라는 표현은 모세를 제3자의 관점에서 평가한 표현이므로 모세 자신이 말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그는 신명기 34장 <오늘날 까지도> 또는 <그 후로 이스라엘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없었다>라는 표현은 모세가 죽은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말해주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모세5경에는 모세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명백한 모순입니다.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특히 스피노자의 비평에 대하여, 그와 동시대 사람이었던 카톨릭 사제 사이몬은 이렇게 반박합니다. 모세5경의 핵심적인 내용은 모세가 쓴 것이지만, 후대의 서기관들과 선지자들이 이전부터 전해져 온 문헌과 기록에 의지해 몇 가지를 수정하고, 첨삭하고, 편집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이몬의 주장은 동료 사제들에게 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모세5경의 일부를 모세가 쓰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을 당시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이몬의 책은 금서 목록에 올랐고 그는 사제직에서 쫓겨났습니다.

 

이전부터 내려온 여러 문서들을 편집해서 하나의 책으로 엮어낸 것이 모세5경이라는 사이몬의 주장은 성경의 저자를 파악하려는 노력에 매우 의미 있는 첫 일보에 해당합니다. 모세 5경이 몇 개의 원전의 결합물이라는 사실은, 성경에서 동일한 사건이 중복되어 서술되는 이중서술doublet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18세기에 학자들은 성경에서 동일한 사건이 서로 다르게 서술되어있는 이중서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중서술된 곳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조에 관한 2개의 서로 다른 기사, 노아의 방주에 탄 동물의 수에 관한 2개의 상반된 서술,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꾼 이유에 관한 2개의 서로 다른 설명, 모세가 바위에서 물을 낸 2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 등등. 이런 이중서술의 문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학자들은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런 이중서술된 기사의 한쪽그룹의 이야기에는 항상 신을 고유명사 여호와Jehovah로 부르는 반면, 다른 한쪽 그룹의 이야기에선 언제나 하나님Elohim 이라는 일반명사로 부른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본문에서 신을 어떻게 부르냐에 따라 이야기를 2그룹으로 나누어 보니, 사용된 문체나 선택된 주제, 사건의 연대나 서술방식에서 서로 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19세기가 되자 사람들은 모세5경은 원래 4개의 문서가 결합되었으며, 각각의 문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역사적-종교적-정치적 관점을 가지고, 최소한 1명의 편집자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모세5경이 원래 4개의 문서를 기초로 구성되었으며, 또한 각각의 4개의 문서도 오랜 시간 동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고 다듬어져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성경의 원전에 관한 가설 혹은 문서 가설 Documentary Hypothesis>이라고 부릅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모세5경은 다음의 4개의 문서로 구성되었습니다. 우선 신이 어떻게 불려 졌는가를 기준으로 해서, Jehovah라 불려진 문서를 여호아Jehovah 문서라 부릅니다. 보통 줄여서 J문서라 합니다. 그리고 신을 Elohim라 부른 문서를 E문서라고 합니다. 셋째로 예배 규정이나 사제 직분과 관련된 사항을 중점적으로 기록한 문서를 제사장priestly 문서, 또는 줄여서 P문서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신명기Deuteronomy에서만 발견되는 기록을 보여주는 문헌을 D문서라고 합니다.

 

모세5경이 4개의 원전 J, E, P, D 문서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의 발견은 문제의 시작에 불과 합니다. 이 각각의 문서를 누가 썼는지, 언제 썼는지, 왜 썼는지, 같은 시대에 쓰여졌는지, 어떤 문서가 가장 오래 되었는지, 저자들끼리 서로 알고 있었는지, 그들은 어떤 관계였는지, 각각의 저자들은 서로의 문서에 대해 그 존재여부를 알고 있었는지, 이 문서들이 어떻게 보존되고 나중에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떻게, 무슨 이유로 편집되었는지 등등의 문제가 여전히 남습니다.

 

위의 모든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몇 가지는 상당한 수준의 연구가 진척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각각의 저자들이 어디에서 살았는지, 어느 때에 살았는지, 또한 각각의 저자가 처한 역사적 배경과 사건이 어떤 식으로 원전을 기록할 때 영향을 주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성경의 원전이 쓰여지던 시기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by legein | 2011/01/19 11:11 | 최근 글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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